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생애 (문단 편집) ==== 포위전 승리와 장군 진급 ==== 툴롱 포위전에서의 나폴레옹은 비록 총사령관이 아닌 포병지휘관으로 아직 영관급에 불과했지만,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보급와 훈련 등 포위군의 총체적인 개선에 나섰다. 전술적 재능 역시 본격적인 첫 전투인 이 때 이미 발휘되어, 해안가에 분산된 반혁명 연합군 방어선의 약점을 간파하고, 포병대를 해안에 전진배치해 연합군 함대를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포위전을 총지휘한 혁명군 사령관들은 군사적 자질이 아니라 정치적 충성도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나폴레옹의 활약을 궁극적인 승리로 이끌어 낼 능력이 없었다. 첫번째 사령관인 카르토는 화가였으며 연합군 요새에 대해 무모한 보병 돌격을 감행하다 실패했고, 결국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라는 든든한 연줄을 가진 나폴레옹이 그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자 소환되었다.[* 공포정치 하에서 혁명정부는 전투에서 패전한 지휘관도 투옥시켜 처형하기 일쑤였는데, 카르토 역시 투옥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덕에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살아남았으니,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았을 때, 그에 의해 지방 행정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813년 62세로 사망.] 교체된 사령관은 도페 장군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잠깐이나마 군대 경험은 있었지만 그건 10대 시절의 일이었고, 그의 직업은 내과 의사였다. 그는 최음제나 일종의 기 치료법 같은 걸 주로 시술했고, 심지어는 피 공포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걸 보면, 돌팔이 의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나 '정치적으로 안전'한 인물이기 때문에 임명되었으나, 역시나 군사적 재능은 전무했고, 임명된 지 며칠도 지나지않아 '질병을 이유로' 사임했다. 마지막으로 임명된 뒤고미에 장군[* 툴롱 포위전 이후에는 주로 스페인을 상대로 한 전투를 지휘했으며, 여기서도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지만 툴롱 포위전으로부터 1년도 지나지않은 1794년 11월에 전사한다. 만일 살아남았다면 나폴레옹에 의해 원수로 진급했을 가능성이 상당한 인물이다. 그의 휘하에 복무하다가 나중에 나폴레옹의 원수가 되는 인물이 2명이며, 그외 나폴레옹의 측근 중 상당수가 뒤고미에와 관련된 인물이다.]은 직업군인이었으며, 나폴레옹의 능력과 그가 제시한 작전을 인정하고, 파리의 혁명정부에 추천서를 보내주었으므로, 나폴레옹은 툴롱 포위전을 사실상 지휘하게 된다. 사실 이전 지휘관들이 무능했던 것은 나폴레옹에게는 천운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의 능력이 상대적으로 돋보였고, 그의 계급보다 더 많은 실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불과 몇 달의 기간중에도 지속적으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나폴레옹의 전략이 맞아들어가서 그가 배치한 포대의 포격을 버티지 못한 연합군은 결국 혁명군의 포대를 파괴하려 무모한 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오히려 역공을 가한 혁명군에게 툴롱을 점령당하게 된다. 영국 해군은 대부분 도망가는 데 성공했으나, 영국 육군과 스페인, 이탈리아군은 대부분 항복하여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 때 영국군을 이끌다 나폴레옹에에 항복한 지휘관은 찰스 오하라 장군인데, 그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콘월리스의 부관으로 요크타운 전투에서 패전한 후, 미국-프랑스 연합군에게 항복사절로 간 인물이다. 요크타운 전투때는 이미 나이가 마흔이었지만, 프랑스군 지휘관 로샹보와 미군 지휘관 워싱턴은 콘월리스가 직접 안오고 새파란 부관을 보냈다면서 그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아 워싱턴의 부관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겪었는데, 툴롱 포위전에서는 50대의 나이로 자신의 절반도 안되는 새파란 영관급 장교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 셈이다. 어쨌든 그는 워싱턴과 나폴레옹에게 직접 항복신청을 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을 다룬 영화 '패트리어트'에도 등장하는데, 현대 영국인들이 분노할 정도로 영국을 악역으로 표현한 영화라 그의 대접도 좋지 않다. 영화 내내 콘월리스 옆에서 아부를 떨다가, 요크타운에 포위되자 제발 항복하자고 간청하는 부관이 바로 오하라이다.] 이후 혁명군이 미처 도망가지 못한 왕당파를 학살하였는데, 나폴레옹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전투중에 부상을 당해서 입원중이었다.] 한편 포위전 승리의 공로로 나폴레옹은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이후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수비 사령관을 제안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하고 '이탈리아 방면 포병 사령관'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